[ITWorld 넘버스] IT 설문조사 ‘숫자의 덫’을 피하는 방법
얼핏 보면 IT 조사 보고서에서 욕망을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국내 태블릿 사용자 83.8%가 키보드와 펜을 사용한다는 한국IDC 조사 결과 속 숫자는 무색무취하다. 이런 액세서리를 통해 태블릿이 점점 더 생산성 기기로 포지셔닝하고 있다는 분석을 덧붙여도 마찬가지다. 전문 시장조사업체가 특정 업계의 소수 전문가 혹은 실무자 다수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는 다른 의도로 읽기 어려울 만큼 단순명료하다. 반면 IT 업계에도 이해당사자의 욕망이 부딪히는 사안이 있다. 기업과 직원, 기업과 정부, 혹은 기업과 기업 간에 이해가 충돌하는 경우 같은 사안에 대해 결이 다른 보고서가 나온다. 대표적인 이슈가 바로 AI다.
'4인 4색' 속셈이 다른 AI 설문조사 속 숫자들
먼저 AI를 현재 혹은 미래 수익사업으로 삼은 업체의 설문조사를 보면, AI는 기업과 투자자, 사용자 모두에게 이익이다. AI에 100억 달러, 우리 돈 13조 원 넘게 쓴 것으로 알려진 마이크로소프트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이 AI에 1달러를 투자했을 때 3.5달러를 이익을 거둘 수 있다. AI 투자를 회수하는 기간도 14개월에 불과하다. AI 열풍의 최대 수혜자인 엔비디아의 조사 결과를 보면, 기업 10곳 중 7곳은 AI가 매출 증대에 도움이 됐다. 뒤늦게 AI에 뭉칫돈을 넣고 있는 AWS의 대규모 설문조사는 사용자에 초점을 맞췄다. 응답자 대부분이 AI 역량이 경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했고, AI 역량을 갖춘 직원은 연봉이 18% 오른다.AI 트렌드를 이끄는 업체가 장밋빛 미래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면 공공 성격이 강한 조직은 AI의 부작용을 경고하고 제도적인 대책을 마련하라고 강조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보고서를 통해 전 세계 일자리의 40%가 AI의 영향을 받을 것이며 소득 양극화가 더 심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영국의 진보적인 싱크 탱크 공공정책연구소(IPPR)는 AI의 영향으로 영국에서만 790만 개 일자리가 사라지고 GDP 성장이 정체될 수 있다며, AI의 개발과 활용을 시장에 맡기지 말고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네스코는 이미 2021년에 AI로 인한 인종차별 심화와 프라이버시 침해, 대중 감시 등을 막기 위한 윤리 권고를 내놓았다.
AI 선도 업체와 공공 조직의 입장이 확연하게 갈린다면, 후자의 입장과 비슷하면서도 시장 친화적인(?) 해법을 내놓는 업체가 있다. 기업이 AI 혹은 데이터를 통제하는 솔루션을 파는 업체다. 워크데이 보고서에 따르면, CEO 67%가 AI의 최대 위험 요인으로 잠재적 오류를 꼽았다. 업무관리 플랫폼 업체 아사나는 직원에게 명확한 AI 활용 지침을 주는 기업이 1/4에 못미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베리타스 조사 결과 AI가 직장 내 분열을 불러오고 정보 유출을 야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두 AI의 어두운 면을 강조하면서, 혼란을 막기 위해 AI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구체적인 해법은 자사의 솔루션이다.
시장조사업계는 AI에 대한 이 모든 관심과 혼란, 주장과 충돌이 '모두' 나쁘지 않다. AI는 기업 IT 역사상 전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짧은 기간에 기업 인프라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이런 메가 기술 트렌드의 초기에는 모두가 확신 없이 한발씩 나아가는 상황이므로, 위험이 적은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와 컨설팅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난다. 주요 시장조사업체가 내놓는 AI 관련 보고서에 기업과 언론이 큰 관심을 보이고 비중 있게 다루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부 업체는 시장조사업체와 함께 자사에 유리한 설문조사 결과를 내놓고 시장을 선점하려 한다. 시장조사업체 입장에서는 수익성 좋은 'AI 특수'다.
시장조사업체가 이런 보고서를 통해 내놓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준비(투자)하라'는 것이다. 딜로이트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글로벌 기업의 75%에서 3년 이내에 AI로 인해 조직의 대전환이 나타난다. 활용 전략과 인프라는 어느 정도 준비됐지만 인력, 거버넌스, 리스크 등은 더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가트너는 2025년까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리더의 절반 이상에 AI 관리 업무가 명시적으로 맡게 될 것으로 봤다. 인재 관리 등의 스킬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밖에 AI 시장을 세분화해 성장 전망치를 내놓는 것도 시장조사업체의 역할이다. 엣지 AI, 생성형 AI 솔루션, 소프트웨어 개발, AI PC, 사이버보안, AI 반도체, AI 옵스, 사용자 경험 등이다.
비싸지만 영향력도 큰 콘텐츠 마케팅
AI를 둘러싼 설문조사를 보면 그 배경에 다양한 이해와 욕망이 있고 보고서에는 각 업체의 입장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이런 숫자는 시장과 기술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때로는 명확한 목적 없이 혹은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여 기술을 도입하는 일종의 충동구매 '덫'이 되기도 한다. 이런 덫에 걸리지 않으려면 비판적인 숫자 읽기가 필요하다. 널리 알려진 시장조사업체의 자료라고 해도 특정 업체의 자금 지원을 받아 진행된 경우가 있으니 확인해야 한다. 업체가 별도로 설립한 기관 이름으로 조사를 진행해 보고서를 내놓기도 한다. 마치 중립적인 조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기업의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설문조사는 결과 수치를 이용해 시장과 사용자 혹은 기업을 설득하는 콘텐츠 마케팅 활동이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취사선택과 의도가 반영되는 취약점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누가 더 설득력 있는 숫자와 분석을 내놓는가의 경쟁이다. 사람들의 생각에 더 부합하는 숫자가 모여 기술과 관행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가시적인, 때론 파괴적인 시장의 변화로 이어진다. 이는 경제에 국한된 것은 아니고 정치, 문화 등 모든 분야가 똑같다. 질문을 만들고 설문조사를 하고 결과를 분석해 보고서를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에 전문성이 필요하고, 조사 전문업체에 맡기면 비용이 몇 배로 뛰기도 하지만, 많은 업체와 조직이 여전히 설문조사를 선호하는 이유다.
숫자는 태생적으로 정치적
단, 아무리 정교하고 설득력 있는 분석도 소용없는 경우가 있다. 의사결정권자의 근거 없는 확신과 마주할 때다. 최근 이를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있는데, 바로 원격근무다. 원격근무는 팬데믹 당시 일상적인 업무 방식이었지만, 팬데믹 이후 많은 기업 경영진이 직원에게 사무실 출근을 강요하면서 갈등을 빚고 있다. 테슬라, AWS, 델, 구글, IBM, 줌 등이 사무실 출근을 확대 혹은 강제했고, 일부는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으면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IBM과 줌의 행보는 특히 당혹스럽다. 생산성이 가장 중요하고 협업 앱을 통해 손쉽게 원격근무를 할 수 있다는 설문조사로 제품과 서비스를 팔았지만, 정작 내 회사에는 적용하지 않았다.원격근무에 대한 업계와 학계, 공공기관의 수많은 조사와 연구 결과는 일관되게 한가지로 수렴된다. 원격근무를 하면 직원이 출퇴근 시간만큼 집에서 더 일하고 생산성이 개선되며 더 오래 근속한다는 것이다. 직원 조사뿐만 아니라 직원 성과를 평가하는 채용 담당자 조사에서도 같은 결론이었다. 원격근무의 생산성이 18% 떨어진다는 MIT 연구 결과가 반대 근거로 종종 인용되지만, 이 숫자는 인도에서 데이터 입력 신입 사원을 선발한 후 출근 첫날부터 원격근무를 한 경우와 아닌 경우를 비교한 결과다. 연구진 역시 이 보고서가 원격근무 여부를 결정하는 근거가 아니라 원격근무를 어떻게 시행할지 정책을 만들 때 참고하라고 권고했다.
일부 IT 기업 최고 경영진이 원격근무 대신 사무실 출근을 선호하는 근거 혹은 숫자는 무엇일까? 업무 환경 컨설팅 업체 DAE(Disaster Avoidance Experts)의 CEO 글렙 치푸르스키는 '없다'고 단언한다. '생산성은 곧 출근'이라는 신념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미래 포럼(Future Forum) 조사에 따르면 원격근무 반대파는 주로 50~60대 임원이다. 미국 피츠버그대 연구팀은 사무실 복귀를 의무화하는 기업 CEO 상당수가 강제 출근 정책을 통해 직원으로부터 권력을 되찾고 싶어하는 남성이라고 분석한다. 반면 50대 이하 임원은 하이브리드 근무 혹은 원격근무에 포용적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격근무는 대세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당장의 갈등은 피할 수 없다. 대퇴직과 정리해고, 조용한 퇴사와 출근 강요가 정면 대결한다. 현실의 숫자와 근거 없는 신념이 충돌할 때, 숫자는 정치적인 성격을 갖는다. 개별 기업 내 갈등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변화를 앞당기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원격근무 방식과 조건에 대한 입법이 진행됐다. 결국 세상을 지키고 바꾸고 구하는 것은 선거와 정치다. 당장 도드라진 이슈는 원격근무지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AI를 활용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 역시 정치의 영역에서 해법을 나올 것이다. 기술에 대한 설문 결과라고 해도 숫자는 태생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editor@itwor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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